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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과 울프는 100년 앞선 신경 과학자였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07-12-22 10:21:16    조회 : 655회   
세잔과 울프는 100년 앞선 신경 과학자였다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지호| 384쪽| 1만8000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예술과 과학은 사실 닮은 구석이 많다. 수학과 시는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실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또 예술과 과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피사체를 찍어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사진이 등장하자, 화가들은 사실을 재현하는 인물화나 풍경화와는 다른 화법(畵法)을 고민해야 했다. 예술과 과학은 우주와 인간의 진리를 탐색할 때 선후가 엇갈리기도 한다. 문학이나 예술이 발견한 진실들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과학적으로 확인되고 규명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책은 길게는 100여 년 전 예술가들이 시도한 창조적 작업이 훗날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례들을 담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뇌의 비밀, 즉 신경과학에 관한 것이다.

후기인상파의 창시자인 폴 세잔(1839~1906)은 식탁에 놓인 사과를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화가로서 그는 눈(眼)으로만 관찰하는 건 충분하지 않다고 믿었다. 모네와 르누아르,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은 카메라가 담지 못 하는 시간의 흐름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들이 이용한 건 빛이었다. 이를테면, 기차가 내뿜는 연기가 공기 속에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를 묘사하려 했다.

그러나 세잔은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형태들이 정신적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종 불필요하게 추상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세잔의 그림은 시각의 주관성, 즉 마음이 현실을 창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눈에 보이기 전의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과학자들은 나중에 밝혀냈다. 빛의 신호는 시작에 불과했다. 1950년대 후반 신경학자들은 대뇌피질이 어떤 종류의 시각 자극에 반응하는지 실험했다. 고양이 망막에 빛의 점들을 쏘는 한편, V1으로 불리는 뇌영역(시각피질의 첫 단계)으로부터 나오는 세포 전기를 전기침으로 기록하려 했다. 전압이 감지되면 세포가 뭔가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놀랍게도 뇌세포들은 빛의 점들이 아니라 선들에 반응했다. 선들을 이어붙인 조각보 같은 세잔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하는 실험 결과였다.

 소설가들에게서도 과학적 직관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의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천식 때문에 밖에 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억 안에서 글감을 찾았다.

‘…다시 세 모금째를 마시자 두 모금째보다 느낌이 줄어들었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차는 그 마법을 잃어가는 것이다. 내가 찾는 진실이 찻잔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147쪽)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과자 마들렌(레몬즙으로 향을 낸 버터맛 쿠키)과 함께 기술되는 이 대목엔 프루스트 예술의 진수가 배어 있다. 두개골 안에서 우리 감각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했던 1911년, 그는 시각·촉각·청각과 달리 후각·미각은 장기(長期) 기억 센터인 해마 조직에 기록돼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한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마들렌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탐구하는 것을 도와주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었다.

2000년에 카림 네이더 등 미국 뉴욕대학의 신경과학자들은 회상하는 행위가 사실상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가정한 동물실험을 했다. 실험용 쥐에 화학물질을 주사해 두려운 기억을 회상하는 것을 차단하자 기억의 흔적 또한 사라졌다. 회상할 때마다 기억의 뉴런 구조가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마들렌의 본래 맛에 대한 진짜 기억에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셈이다.

이 책에서는 과학보다 먼저 인간 두뇌의 비밀을 통찰했던 예술가 8명이 주인공이다. 화가 폴 세잔,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1882~1941), 시인 월터 휘트먼(1819~1892),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 요리장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6~1935) 등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건 당대의 과학이었다. 휘트먼은 뇌 해부 서적을 연구했고 울프는 정신병리학을 배웠다고 한다. 예술과 과학의 결합이 이따금 얼마나 위대한 예술작품을 낳는지에 대한 본보기다.

이 책의 클라이맥스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다. 1913년 그의 교향곡 ‘봄의 제전’이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연주될 때 청중은 격렬히 저항했다. 그들이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던 불협화음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음악의 아름다움이란 불변의 것이라고 믿었다. 으뜸화음으로 마무리하는 오케스트라의 만족스런 소리를 귀에 담고 싶어할 때, 스트라빈스키는 커다란 북을 쳐댄 셈이었다. 그러나 이 작곡가는 한참 앞서 있었다. 그는 좋은 음악이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음악에 적응하는 인간의 능력을 믿었다.

실제로 신경학자들은 훗날 우리의 음감(音感)은 계속 변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청각 피질의 뉴런(신경세포)들은 우리가 실제 듣는 노래와 교향곡들에 오늘도 조금씩 변경되고 있다. 우리 뇌가 자신을 바꾸는 능력이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음악을 “우리가 알아듣는 법을 배운 소음들의 패턴”으로 정의한 스트라빈스키는 시간이 지나면 ‘봄의 제전’도 아름답고 고전적인 교향곡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됐다.

저자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신경과학을, 옥스퍼드 대학에서 20세기 문학과 신학을 공부한 20대 청년이다. 그는 예술이 어떤 과학보다 우리의 경험을 잘 설명해준다는 데 착안했다. 이 책 속에서 과학보다 앞서 인간 두뇌의 비밀에 다가간 것 같았던 여덟 명의 예술가들을 살피는 저자는 과학과 예술이 통합되면 종종 유용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학과 예술이 거의 접촉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우리 문화풍토를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다.

도서 분류상 ‘신경과학’으로 분류돼 있다는 게 싱거울 정도다. 스트라빈스키의 말을 조금 빌리면, 이 책은 과학자들의 뇌와 예술가들의 뇌를 동시에 공격하는 음악이다. 원제 Proust was a Neuroscie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