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보내는 신호 ‘블랙아웃’을 아시나요?
국민일보 | 기사입력 2008-02-28 16:22 | 최종수정 2008-02-28 16:42
[쿠키 건강]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그린 액션 스릴러 영화 ‘블랙아웃’. 단기기억 상실증을 소재로 한 이 영화의 제목인 ‘블랙아웃’은 실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용어 중 하나다.
지난해 현란한 컴퓨터그래픽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영화 초반 미군 카타르 공군기지의 레이더망을 교란시키며 전 기지를 초토화시키는 헬리콥터 형태의 악당 로봇 ‘블랙아웃’도 이 용어의 의미를 그대로 살린 캐릭터다.
이들 영화에서는 ‘블랙아웃’이 각각 ‘일시적인 기억상실’과 레이더망 등의 ‘송신 교란’의 의미로 쓰였지만, 이외에도 연극에서의 무대 암전(暗轉), 등화 관제, 뉴스의 보도 관제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특히 블랙아웃은 신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응·증상과 관련된 용어로도 쓰이는데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익사 직전 쇼크 ‘블랙아웃’=일반적으로 호흡장비 없이 전용 슈트, 마스크(수경)만으로 잠수하는 프리다이빙(freediving)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프리다이빙의 경우 폐활량을 단련시킨 호흡법 훈련을 통해 2∼6분 정도 호흡을 참고 물속을 누비게 되는데, 자신의 신체적인 능력과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깊이 오래 물속에 들어가려 할 경우 무리한 초과호흡으로 연결돼 기절을 초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보통 깊은 곳에서 수면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해 ‘얕은 수심의 기절(shallow water black out)’이라고 부르지만 수심 30m 이상까지 들어가게 되는 본격적인 프리다이빙에서는 꼭 얕은 물(5m 이내)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블랙아웃이 되는 과정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무의식적인 돌발행동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 때 물속에서 발을 버둥거리는 행동이 삼바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삼바(samba)’라고 불리기도 한다.<동영상 참조>
이 상태에서는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 즉각적인 사망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현상인 만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블랙아웃 상태에서 시간이 1분 정도 지체될 경우 뇌손상이 시작되며 4분이 지나면 숨을 거두게 된다.
◇전투기 조종 중 블랙아웃=프리다이버 뿐 아니라 항공기 조종사 역시 비행 중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게 되는데 이 역시 블랙아웃으로 불린다. 프리다이빙에서의 무호흡으로 인한 것과 달리, 이 경우 기체의 갑작스런 고도변화와 조종사에게 미치는 엄청난 가속도를 이기지 못해 발생하게 된다.
기체가 급선회하거나 급상승할 경우 신체에 미치는 가속도가 몸무게의 5∼6배에 달하게 되는데, 이때 피가 다리쪽으로 쏠려 시야 혹은 뇌에 혈액공급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에는 눈으로 가는 혈액량이 감소해 시야가 좁아지는 그레이 아웃(gray out)이 발생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시야가 사라지는 블랙아웃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몸, 허벅지 등을 꽉 조임으로써 물리적으로 피쏠림을 차단하는 특수 복장인 지수트(G-suit;가속도방호복)라는 것을 입게 되는데, 이 장치가 풀리게 되면 훈련받은 조종사라 하더라도 블랙아웃 상태에 빠지게 된다.
지슈트는 전투기 조종사 뿐 아니라 엄청난 속도와 가속도를 이겨내야 하는 시속 1000km 이상의 음속자동차 운전자, F1(fomula 1) 선수들도 안전과 사고방지를 위해 입는다.
블랙아웃과 대비되는 현상으로 ‘레드아웃’이 있는데 이것은 반대로 피가 머리쪽으로 쏠려 정신을 잃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안구안쪽의 모세혈관이 터지거나 심하면 뇌혈관 까지 터지는 뇌출혈을 일으킬 수 있어 블랙아웃보다 위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신을 잃는 것은 같지만 피쏠림 현상으로 안구가 빨갛게 되기 때문에 이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파일럿의 자격조건 중 신체조건이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도 이처럼 일반인보다 많은 가속도를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필름 끊겼다’…음주 후 블랙아웃=일상생활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본 블랙아웃이다. 소위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앞서 두 경우가 의식을 잃는 것이라면 이 경우는 정상적인 행동이 가능한 대신 당시 기억이 지워진 ‘단기기억상실’에 해당한다.
이는 알코올 성분이 체내에 흡수돼 뇌의 단기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을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수면내시경 시술을 받을 때 환자가 숨도 쉬고 말도 잘 하지만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는데, 이것도 음주 후에 겪는 블랙아웃과 같은 경우다. 다만 이 때는 알코올 대신 진정제인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뇌에 영향을 미쳐 기억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증상은 달라도 원인은 모두 뇌손상=이같은 블랙아웃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보이는 신체반응이지만 모두 뇌의 환경이 바뀌어서 나타나는 신체의 특이증상이다.
물속에서의 블랙아웃은 숨을 참게 되면 뇌로 보내지는 산소가 부족해져 뇌에 손상을 입혀 나타나게 된다. 또 갑작스럽게 수면위로 상승시 수압변화로 인해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면서 폐에 피가 몰리고 뇌에 혈액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나타나기도 한다.
단, 사람이 익사하게 되는 경우는 보통 물을 마셔 폐에 물이 차 숨을 거두지만 블랙아웃의 경우는 뇌와 심장 등 최소 기능만을 남기고 신체 기능, 즉 기도까지 닫힌다는 점에서 익사하는 과정과는 구분된다.
전투기 조종시 나타나는 블랙아웃도 가속도에 의한 것만 다를 뿐 피 쏠림(blood shift)으로 인해 뇌에 피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한 산소부족으로 발생한다.
이 때 손상되는 곳은 바로 뇌의 ‘해마’라는 기관으로 단기기억을 담당하며 열·압력·약물 등의 영향에 약하다. 따라서 필름이 끊기는 증상 역시 알코올에 의한 해마 손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해마는 혈당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과도한 인슐린 투여에 따른 저혈당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슐린 쇼크(insulin shock)’도 이와 유사한 증상이다. 특히 흔히 ‘금식기도 중 성령이 임했다’고 말하는 현상도 의학적으로는 저혈당으로 인한 쇼크·환각 등의 신경학적 증상으로 해석한다.
해마와 관련해서는 해마 크기가 크면 기억력이 오래가고,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해마의 크기가 작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영동세브란스병원 김주영 정신과 교수는 “여러 종류의 블랙아웃은 결국 뇌에 산소, 혈액, 혈당이 부족해 해마가 손상돼 일어나는 증상”이라며 “이 중 가장 흔히 접하는 음주로 인한 블랙아웃은 미국의 경우 1년에 1∼2번 정도만 있어도 알코올 의존증을 의심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만큼 자주 발생하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우려할 필요는 없지만 알코올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뇌가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류장훈 기자 rjh@kmib.co.kr <도움말: 영동세브란스병원 김주영 정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