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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이야기 속 동아시아 문명의 새벽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08-02-11 17:16:41    조회 : 496회   
시베리아 곳곳의 이야기와 우리 이야기의 유사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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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부리야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 인근 셀렝게 강변의 게세르 1000년 기념비. <신동호 기자>

나는 이야기 사냥꾼이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고, 신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먹고산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시베리아 오지를 싸돌아다닌다. 여름과 겨울방학 중에 봇짐을 싸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않으면 온몸이 쑤시고, 긴 연휴가 겹치면 북쪽으로 날아가서 ‘구라’를 풀어놓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 안달을 한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그러니 천상 프로필을 대라고 하면 사냥꾼이라 할 때가 가장 마음 편하다.

민족·국가·이데올로기는 배제

이야기는 내 입에서도 나오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딸의 입에도 붙어다닌다. 열 살 안팎의 어린이가 친구들에게서 듣거나 인터넷에서 알게 된 이야기를 줄줄 입에 꿰고 다니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조금 발품을 팔면 내가 사는 곳을 넘어서서, 반도 내의 이야기꾼들을 찾아뵙고 그들만의 세상을 확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서 무심코 지나치고 말지만, 사람이 사는 공간은 말함으로써 드러난 이야기와 말하지 않음으로써 숨겨진 이야기로 가득해서 길을 가다보면 이야기가 발에 툭 차이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이야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천에 널려 있는 이야기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시베리아를 사냥터로 택했냐고 질문하면 그럴싸한 답을 하기 어렵다.

왠지 모르게 시베리아 지역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하랴. 남들이야 부에노스아이레스나 파리 정도는 되어야 선망할 만한 이국적인 대상으로 볼 텐데, 춥고 먹을 것 없어 보이는 느낌을 주는 시베리아에서 이국적인 낭만을 느끼는 나는 아마도 DNA 속에 시베리아와 연관된 무엇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럽이나 미국에 가거나 하다 못해 먹을거리라도 풍부한 중국에 유람을 다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어쩌다 한 번 가는 것도 아니고 매년 내 집 들락거리듯 다니는데 말이다.

그래도 10여 년 전에 비하면 상황이 아주 좋아졌다. 월급을 쪼개어 여행 경비를 마련하지 않아도 다른 데서 보조를 해준다. 세상살이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사냥꾼이 마련할 수 있는 전리품을 준비해서 후원자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도리다. 여행이 잦아지고, 그 기간도 늘어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력서의 뒷자리에 붙는 논문이나 책들의 목록이 불어났다. 이번 2007년 7월에는 경향신문사의 특별취재단과 함께 시베리아와 내몽골을 답사했다. 이번 여행의 사냥감들과 이전에 모아두었던 것들에서 제일 싱싱하고 물이 좋은 놈들로만 골라 ‘뉴스메이커’에 소개할 것이다.

연재할 이야기의 제목을 ‘이야기에 남아 있는 동아시아 문명의 새벽’으로 뽑았다. 사냥꾼의 입장에서 봐도 선정적이다. 이야기 나부랭이와 문명 그것도 새벽의 문명을 연결시키는 배짱이 웃기기도 하고, 돈키호테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정했으니 그대로 나가보자.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민족의 개념과 국가의 개념 그리고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논의에서 옆으로 한걸음 물러설 생각이다. 사실 고대의 미술품들을 관찰하면 그 어디에서고 민족이나 국가를 찾기 어렵다. 이데올로기와 주의를 찾는 것은 더 난망한 일이다. 마치 민족주의의 보루처럼 보이는 신화의 세계에서도 사실상 민족과 이야기의 내용을 연결시키는 해석은 그다지 오래된 접근법이 아니다. 그러니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우리 민족이 어디서 나왔다거나 그 문화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다는 식의 거대담론을 말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문화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동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이 사냥꾼의 의도다. 여기서 문학적인 형식을 가진 이야기들만 펼치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야기를 싫어할 분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아닌 종교적인 의식이나 다양한 박물의 형태로 세상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냥꾼이 펼칠 이야기의 세계에는 기성 이야기, 다양한 박물과 세계관 그리고 그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넣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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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 서쪽 옛 부리야트자치구(지금은 이르쿠츠크 주로 편입)의 한 샤먼이 방문자를 위한 의식을 펼치고 있다. <김문석 기자>

첫 번째는 단군신화의 탈신화화

하지만 제일 처음 내놓는 이야기는 좀 무거운 것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단군신화와 관련된 담론이다. 민족과 결부된 단군신화가 아니라 이야기 텍스트로서의 단군이다. 미리 내용을 말해버리면 싱겁다. 하지만 조금 맛보기를 하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단군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실 단군신화의 텍스트와 상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신화를 무척 자의적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해서 신화의 내용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첫 번째 이야기의 내용이다. 음, 좀 더 먹물답게 설명하면, 롤랑 바르트의 신화해체 개념을 덧붙여서 ‘단군신화의 탈신화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이야기로, 알타이-투바-하카스-사하 야쿠트-부리야트 등에서 캄챠트카의 코략과 이텔멘에 이르는 지역의 이야기를 대강 말하고, 우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지를 생각해볼 참이다.

두어 번 글을 쓴 뒤, 독자들이 여전히 흥미를 느끼고 있으면, 본격적으로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샤먼들의 동태를 샅샅이 밝혀내는 이야기를 몇 번 더 써볼 생각이다. 샤머니즘과 샤먼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냥 민속이나 흥밋거리로 생각하면 어떠랴. 정한수를 떠놓고 떠나간 님을 그리며 행복을 비는 모습을 샤머니즘이라고 생각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샤머니즘은 과거의 역사이고, 현재의 문화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현대를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조금씩이라도 알고 있는 게 얼마나 유용한지 모른다. 휴대전화를 파는 직장인들은 시베리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소수종족들의 문화를 익히면, 판매량을 급속도로 올리는 비법을 찾을 수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문화는 인간 삶의 어디에서고 발견되며, 예술 특히 이야기 문화는 우리 삶의 전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한반도 북쪽의 오지인 시베리아 지역의 이야기 세계로 들어가자. 시베리아의 이야기 세계가 동아시아 문명의 새벽과 맺는 관계는 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찾으면 좋으리라.

<양민종|부산대 교수·러시아문학>

스크랩 : 뉴스메이커 745호 2007년 10월 16일 커버스토리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5672&pdate=뉴스메이커-7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