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자유의지 - 장동순 교수 (펌) > 교수칼럼 Professor's column | MS Quantum Neuroscience Institute

운명과 자유의지 - 장동순 교수 (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07-05-11 07:22:23    조회 : 643회   
운명과 자유의지(1)

인간이 60조의 의식를 가진 세포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유기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다.

사실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정신 또는 자유의지가 무수한 세포들의 모여서 이루어진 속성과 끊임없이 타협하고 투쟁을 하면서 사는 것과 같다. 아주 비근한 예를 들면 담배나 술을 끊지 못하는 등 관습에 얽매인 사람은 사람은 세포들의 속성 또는 습기에 자유의지가 굴복한 것과 같다.

일견 보기에는 사람의 머리가 모든 의식을 가진 유일한 통제 기관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머리는 단지 중앙통제 장치일 뿐 사람에게는 60개조의 세포가 모두 의지를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사람의 머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폐와 대장이 가슴이 허하지고 장이 찢어지는 비애를 느끼는 세포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리고 기쁨과 희열에 가슴이 퍽차오는 것은 머리의 역할이 아니고 심장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장이 약한 사람은 집중적인 정신 통일을 하는 사고 능력이 극도로 저하된다. 이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보면 이미 경험하여 본 바 있는 사항들인 것이다.

사주팔자나 기타의 다른 운명론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속성들의 결집을 중심으로 이론적으로 모델화 한 것에 불과하다. 사주라는 것은 전생에 살다간 흔적이나 화장을 지우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해변에 나온 순진 무구한 아이들은 절대로 어제에 놀던 방식에 따라 놀려고 하지 않는다. 가방끈이 길어 견탁에 많이 물든 어린들이나 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속성이나 운명론적인 업보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판단이 만들어낸 하루 하루 생활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율적이고 피해적인 의미에서 운명이나 보다 큰 의미에서 숙명이라는 단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현재의 육십갑자에 의한 "육갑떤다" 할 때의 "육갑"과 사람의 생긴모양을 보고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는 " 꼴값"은 모두 주변 상황과 반응하여 자기가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이다. 육값은 정신적인 면에서 본 것이고 꼴 값은 물질적인 면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의 차이 또한 없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정신이나 의식과 같은 에너지가 집중되고 파동이 낮아지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영적으로 발전한다는 말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러한 속성에 굴복하는 빈도수를 줄이고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60개조의 세포를 통제하면서 그 능력을 하나로 통일 시켜 활용하면서 산다는 말과 같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보다 자유로운 사람이다. 습기나 기대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여래장을 펴보일 수도 있고 붕어빵 장수를 계속 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마치 태종 이방원이 사병을 쥐고 있는 신하들의 군대를 타파하고 중앙 집권화하는 개혁과 같은 것이다. 60조의 세포들이 한마음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리라.

그러나 개혁은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의 차원에서나 막강한 기득권층의 강력환 저항을 불러오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기에 개혁이 성공하기 위한 단 하나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사회나 개인을 막론하고 개혁만의 스스로의 업보에서 벗어 날수 있다는 자각이며 영적인 진보인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욕을 한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욕을 한 그 사람이라는 개인이나 사회의 성숙이 전제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개혁의 대상인 살아 있는 생명체는 필사적으로 저항을 할 것이며 그 경우 개혁의 성공 가능성은 점점 약하여 질 것이다.